환자가 서울의 한 병원에서 촬영한 MRI 영상을 부산의 다른 병원 의사가 클릭 몇 번으로 즉시 확인할 수 있는 세상, 이제 한국 의료 현장에서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의료 데이터 상호운용성이 의료 시스템의 미래를 결정짓는 핵심 키워드로 부상한 지 오래입니다. 환자 정보가 각 의료기관마다 고립된 ‘데이터 섬’처럼 존재할 때, 진료의 연속성은 깨지고 불필요한 검사는 반복되며 의료 비용은 증가합니다. 한국보건의료정보원(KHIS)과 HL7 Korea가 2025년 7월 ‘FHIR 커넥타손(Connectathon)’ 행사를 개최한 것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국내 표준, ‘한국 핵심교류데이터 전송 표준(KR Core) V2’ 의 실전 적용을 목표로 한 결정적인 움직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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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ggle현장 검증의 장: FHIR 커넥타손에서 벌어지는 일
의료기관, EMR(전자의무기록) 업체, 솔루션 개발사 등 총 8개 기관이 모인 이 실험의 장에서, 참가자들은 KR Core V2 표준안 기반의 FHIR 서버와 클라이언트를 구축하고 실시간 데이터 교환을 수행했습니다. 단순히 데이터를 주고받는 것을 넘어, 프로파일 적합성, 표준 용어 사용의 정합성, 오류 검출 메커니즘 등이 철저히 검증되었습니다.
한국보건의료정보원 염민섭 원장은 이 행사의 의미를 “국내 의료데이터 상호운용성 수준을 국제규격에 부합하도록 끌어올리는 계기”이자, “국내 보건의료 IT 산업의 글로벌 시장 진출 가능성을 높이는 핵심 기반”으로 설명했습니다. 이는 기술 표준을 넘어 산업 경쟁력의 문제로 접근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왜 FHIR인가: 의료 데이터 교환의 진화
FHIR(Fast Healthcare Interoperability Resources)은 현대 웹 기술(API, JSON, XML) 을 활용하여 이전 세대 표준들의 한계를 해결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복잡하고 경직된 메시지 교환 방식 대신, ‘자원(Resource)’이라는 모듈식 구성 요소를 중심으로 유연하고 개발자 친화적인 접근을 제공합니다.
다음 표는 의료 데이터 표준의 진화와 FHIR의 차별점을 보여줍니다.
| 특징 | HL7 v2 (과거의 주류) | HL7 FHIR (현재와 미래의 표준) |
|---|---|---|
| 기술 기반 | 메시지 기반, 주로 텍스트 형식 | API 기반, JSON/XML 형식 |
| 유연성 | 커스터마이징 가능하나 비표준화 위험 | 모듈식 ‘자원’ 설계로 높은 유연성 |
| 개발 편의성 | 전문 지식 필요, 통합 시간 길음 | 웹 개발 표준 활용, 통합 시간 단축 |
| 주요 적용 분야 | 병원 내 시스템 간 연동 | 병원 간 연동, 앱 개발, 연구, 환자 접근 등 |
글로벌 현황과 한국의 위치
전 세계적으로 FHIR 채택은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2025년 HL7 International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71%가 자국에서 FHIR이 실제 사용 사례에 활발히 적용되고 있다고 보고했으며, 54%는 향후 몇 년 내 채택이 크게 증가할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미국은 연방정부 차원의 ‘FHIR 액션 플랜’을 추진하며 리더십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국은 ‘보건의료데이터 용어 및 전송 표준’ 을 통해 FHIR 기반의 KR Core를 국가 표준으로 제정해나가고 있습니다. 2023년 V1을 시작으로, 2025년 7월 실증 행사에서 검증된 V2는 국제 표준과의 정합성을 높이고 현장의 요구사항을 반영해 한층 발전된 구조를 갖췄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는 한국이 글로벌 흐름에 발맞추어 자신만의 표준화 길을 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실전 적용 사례: 표준이 만들어내는 가치
표준은 이론이 아닌, 실제 의료 현장에서 다음과 같은 변화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 원격 진료와 의료 협진의 핵심 인프라: 지역 병원과 상급 종합병원이 FHIR 기반 API로 환자 정보를 안전하게 공유하면, 불필요한 환자 이동을 줄이고 신속한 전문의 진단을 지원할 수 있습니다.
- 연구와 공중보건의 패러다임 전환: 미국 FDA는 FHIR을 활용한 실세계 데이터(RWD) 표준 제출 방안을 적극 검토 중입니다. 동일한 표준으로 수집된 데이터는 신약 개발, 역학 조사, 공공 보건 정책 수립의 질과 속도를 혁신할 수 있습니다.
- 환자 중심 의료의 실현: 환자는 스마트폰 앱을 통해 여러 병원에 분산된 자신의 진료 기록, 검사 결과, 처방 정보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정보 접근성 향상은 FHIR 도입의 가장 큰 성과로 꼽힙니다.
남은 과제와 앞으로의 방향
낙관적인 전망에도 불구하고 과제는 분명합니다. 글로벌 설문조사는 버전 파편화(R4, R4B, R5 등 혼재), 명확한 규제와 재정 지원의 부족, 기술 인력의 전문성 격차 등을 주요 장애물로 지적합니다. 한국 또한 KR Core V2의 실효성을 검증했지만, 이를 전국 수천 개 의료기관의 일상으로 자리잡게 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지원과 협력이 필요합니다.
한국의 의료 데이터 생태계는 중요한 전환점에 서 있습니다. 단순한 기술 도입을 넘어, 환자와 의료진, 기업과 정부가 함께 참여하는 협력적 생태계를 구축할 때 표준의 진정한 힘이 발휘될 것입니다. 표준화의 길은 결국 더 나은 의료를 만들기 위한 공동의 노력인 셈입니다.
의료 데이터가 자유롭고 안전하게 흐르는 미래, 그것이 우리의 건강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는 점을 다시 한번 생각해볼 때입니다.








